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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크래프트라는 거대한 우주 서사시에서 '칼날 여왕(Queen of Blades)' 사라 케리건(Sarah Kerrigan)만큼 강렬하면서도 극단적인 평가를 받는 캐릭터는 없습니다.


수많은 행성을 초토화하고 수조 명의 생명을 도륙한 '우주 최고의 재앙', 혹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동맹조차 서슴없이 배신하는 '냉혹한 전략가'. 우리는 대개 그녀를 저그 군단의 잔혹한 지배자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휘두른 그 피비린내 나는 칼날 뒤에 한 인간으로서 느꼈을 아득한 고독, 사랑하는 이에게조차 이해받지 못했던 절망, 그리고 우주 전체의 구원을 위해 스스로 악마가 되어야만 했던 비극적인 속내가 숨겨져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우리가 알던 칼날 여왕의 껍질을 한 겹 벗겨내면, 그곳에는 은하계에서 가장 외롭고 슬픈 한 여인의 삶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스타크래프트 - 케리건

1. 뉴포크트의 비극, 그리고 타소니스에 버려진 그날의 절규

케리건의 비극은 그녀가 원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갓 어렸을 때부터 강력한 사이오닉 능력을 타고난 그녀는 자신의 힘을 주체하지 못해 실수로 어머니를 죽게 만들고 아버지를 폐인으로 만드는 참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후 테란 연합의 비밀 프로젝트에 강제로 차출되어 존엄성을 짓밟힌 채 암살 병기인 '유령(Ghost)' 요원으로 개조되었습니다.


감정이 통제된 살상 무기로 살아가던 그녀를 구원한 것은 코랄의 후예를 이끌던 아크투러스 멩스크, 그리고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준 짐 레이너였습니다.


특히 레이너와의 만남은 어둠뿐이었던 케리건의 삶에 찾아온 최초의 따뜻한 빛이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한 명의 여성으로서 평범한 행복을 꿈꾸기 시작했던 그 순간, 우주는 그녀를 또다시 차가운 절망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1998년, 우리가 스타크래프트1 테란 캠페인 8장 '뉴 타소니스' 미션에서 목격했던 그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실 겁니다. 멩스크의 명령에 따라 저그 무리를 막아서며 신의를 다했던 케리건. 하지만 목적을 달성한 멩스크는 그녀를 냉정하게 버렸고, 수억 마리의 저그 떼 한가운데 홀로 남겨진 케리건은 저그의 정수 속으로 끌려들어 갔습니다.


무전기 너머로 들려오던 레이너의 절규와, 멩스크의 차가운 버림. 그날 타소니스의 어두운 하늘 아래서 케리건의 인간으로서의 삶은 산산조각 났습니다.


저그의 초월수(Overmind)에 의해 유전자 수준에서 재조합되어 '칼날 여왕'으로 거듭난 케리건. 하지만 그녀가 저그 군단을 이끌며 저지른 무자비한 행보 속에는 초월수나 아몬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그녀만의 감춰진 속내와 최종 목적이 존재했습니다.


오버마인드의 속박을 벗어던진 주체적 의지

초월수가 프로토스의 태사다르에 의해 파괴된 후, 케리건은 자유 의지를 되찾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녀가 그저 저그의 본능에 따라 은하계를 정복하려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진정한 속내는 '자신의 운명을 타인(오버마인드나 멩스크)에게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 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종족 전쟁(Brood War) 시기 그녀가 보여준 치밀한 배신과 지략은, 우주라는 거대한 판 위에서 다시는 이용당하지 않겠다는 처절한 생존 본능이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아몬'의 위협과 은하계의 종말 감지
차 행성에서 짐 레이너가 시체인스 유물을 활용해 케리건을 다시 인간으로 돌려놓았을 때, 그녀는 마침내 우주의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어둠의 아몬이 모든 생명체를 말살하고 군단을 종말의 도구로 쓰려 한다는 사실이었죠.

인간으로 돌아온 케리건이 원했던 것은 단 하나, 짐 레이너의 곁에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멩스크의 공작으로 레이너가 죽었다고 믿게 되고, 아몬이라는 거대한 재앙이 우주를 들이닥치는 상황에서 그녀는 다시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스스로 괴물이 되기로 결심한 자발적 희생
아몬을 저지하고 군단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는 '원시 저그'의 힘을 가진 칼날 여왕뿐이었습니다. 케리건은 짐 레이너가 그토록 목숨 바쳐 찾아주었던 '인간으로서의 삶'과 아름다운 외형을 스스로 포기하고 제로스 행성의 고대 태초의 못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짐... 미안해요. 내가 선택한 길이에요."


그녀의 최종 목적은 복수라는 개인적 감정을 넘어, 자신이 모든 죄업과 괴물의 굴레를 짊어지고 아몬을 소멸시켜 짐 레이너와 은하계가 살아갈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2. 젤나가로의 승화: 승리 뒤에 숨겨진 케리건의 슬픈 입장

스토리의 최종장인 <스타크래프트 2: 공허의 유산> 속속들이 밝혀지는 케리건의 결말은 웅장하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슬픔을 남깁니다.


젤나가(Xel'Naga)로의 거듭남과 아몬의 소멸
공허의 깊은 곳에서 고대 젤나가 '오로스'의 정수를 물려받은 케리건은 pure form(순수한 형체)과 pure psionic(순수한 정수)을 모두 품은 새로운 젤나가로 승화합니다. 붉은 저그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빛나는 불꽃의 형상이 된 그녀는 마침내 어둠의 아몬을 완전히 extinction(소멸)시키며 은하계의 구원자가 됩니다.


그러나, 영원히 짐 레이너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는 비극
구원자라는 거창한 칭호 뒤에 숨겨진 케리건의 진짜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케리건이 그 모든 지옥 같은 고통을 견뎌낸 유일한 원동력은 '짐 레이너와 함께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주를 구하기 위해 젤나가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며, 평범한 물질계에서 사랑하는 레이너와 함께 늙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영원히 박멸되었음을 의미합니다.

  • 인간으로 살고 싶었던 여인의 희생: 은하계를 구한 대가는 그녀가 그토록 갈망했던 '짐 레이너라는 소박한 안식처'를 영원히 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 영원한 고독의 굴레: 모든 생명체를 구원하고 신이 되었지만, 결국 그녀는 신으로서 물질계를 떠나 고독한 공허의 차원에 홀로 남아 세상을 수호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3. 케리건의 서사를 이해할 때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

케리건을 평가할 때 절대 잊지 말아야 할 단 하나의 관점이 있습니다.


<칼날 여왕 서사의 본질:>
케리건을 단순히 '악인에서 영웅으로 세탁된 캐릭터'로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녀는 타인에 의해 강제로 타락당했으나, 마지막에는 오롯이 자신의 '자유 의지'로 잔혹한 악마가 되는 길을 선택해 세상을 구원한 비극적 아바타입니다. 그녀가 지은 죄는 무겁지만, 그 죄를 갚기 위해 그녀가 치른 대가(자신의 전부를 포기함) 역시 우주에서 가장 무거웠습니다.

"드디어, 때가 왔군." 마침내 찾아온 둘만의 마지막 구원

에필로그 미션이 끝나고 찾아오는 마지막 시네마틱을 기억하십니까?


모든 전쟁이 끝나고 2년 뒤, 마라 사라의 쓸쓸한 여관에서 레이너가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여관 문이 열리며 익숙한 후광과 함께 인간의 모습을 한 케리건이 나타납니다.


"갈 준비는 됐어, 카우보이?" (Ready to go, cowboy?)


"드디어... 때가 왔군." (Hell, It's about time.)


보안관 배지를 여관에 내려놓고 케리건의 손을 잡은 채 어둠 속으로 사라진 레이너, 그리고 이후 그 어디에서도 두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는 아련한 후일담.


그것이 신이 된 케리건이 자신을 위해 바친 마지막 기적이자, 은하계가 그녀에게 줄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구원이었습니다.


오늘 밤, 수많은 피와 눈물로 써 내려간 케리건의 비극적인 서사를 떠올리며 스타크래프트 2의 에필로그 영상을 다시 한번 감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 핏빛 칼날 뒤에 숨겨진 한 여인의 외로운 눈물이 여러분의 가슴을 한층 더 깊게 울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