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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MMORPG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rld of Warcraft)>의 수많은 악역 중에서도 '데스윙(Deathwing)'만큼 압도적인 존재감과 비극적인 서사를 가진 존재는 드뭅니다. 온 세상을 불바다로 만든 대재앙의 주범이자 한때 검은 용군단의 위대한 수호자였던 데스윙.

"데스윙이 타락한 것은 악당으로서의 단순한 악의가 아니라,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과 고통에서 나온 결과가 아니었을까?"라는 의구심은 워크래프트의 깊은 오피셜 로어(Lore)를 아끼는 팬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볼 법한 아주 깊이 있고 날카로운 시선입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 데스윙

1. 웅장했던 탄생과 타락의 시작

<티탄이 선택한 '대지의 수호자' 넬타리온>

데스윙의 본명은 넬타리온(Neltharion)이었습니다.

고대 아제로스에서 티탄(Titan)들은 세계를 창조하고 정돈한 뒤, 아제로스의 생태계와 물질계를 수호하기 위해 다섯 마리의 원시용을 뽑아 자신들의 권능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5대 위상(Aspects)입니다.

그중 넬타리온은 티탄 '카즈고로스'로부터 대지와 지하 세계를 통솔하는 권능을 부여받아 '대지의 수호자(Earth-Warder)'가 되었습니다. 그는 다섯 위상 중에서도 가장 힘이 세고 지혜로웠으며, 다른 위상 형제들(알렉스트라자, 노즈도르무, 이세라, 말리고스)에게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는 든든한 리더이자 형님이었습니다.

<대지의 속삭임과 고대 신의 속삭임>
그렇다면 가장 고결했던 대지의 수호자는 왜 세상을 멸망시키려는 악마가 되었을까요? 여기에 넬타리온만의 비극적인 왕관의 무게가 있었습니다.

  • 대지 깊은 곳에 봉인된 '고대 신(Old Gods)'들의 속삭임
    티탄들은 아제로스를 침식하던 악의 근원인 고대 신들(크툰, 요그사론, 느조스 등)을 아제로스 대지 아주 깊숙한 지하 감옥에 봉인했습니다. 문제는 대지를 관장하는 넬타리온의 임무가 바로 이 지하 세계를 감시하고 수호하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넬타리온은 매 순간, 매초마다 대지 밑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고대 신들의 잔혹하고 기괴한 속삭임(무의식을 갉아먹는 환청)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었습니다.
  • "오직 나만이 이 세계의 진정한 무게를 짊어지고 있다"는 고독과 신념
    고대 신들은 넬타리온의 강인한 마음속 허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다른 위상들은 하늘과 꿈, 시간을 다니며 노닐고 있지만, 오직 너만이 이 무거운 대지의 고통을 혼자 짊어지고 있다."
    "너의 형제들은 너의 노고를 알지 못하며, 언젠가 너를 배신할 것이다."

    넬타리온은 자신이 아제로스를 온전히 지키는 '진정한 수호자'라는 확고한 자의식과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끊임없는 속삭임 속에서 그 신념은 점점 변질되었습니다. "내 형제들은 무능하다. 이 세계를 집어삼킬 위협으로부터 아제로스를 평화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강력한 통제력을 가진 나 넬타리온뿐이다"라는 비틀린 신념으로 왜곡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2. 시간이 지나감에 따른 변화: 넬타리온에서 '데스윙'으로

넬타리온의 타락은 단번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수만 년에 걸쳐 심신과 육체가 서서히 파괴되며 완성되었습니다.

1단계: 고대의 전쟁과 '용의 영혼(Dragon Soul)'의 배신
약 1만 년 전, 버닝 리전(단단한 악마 군단)이 아제로스를 침공한 '고대의 전쟁' 때, 넬타리온은 고대 신들의 꼬드김에 넘어갑니다. 그는 악마를 퇴치한다는 명목으로 다른 4대 위상들을 설득해, 각 위상들의 정수를 조금씩 쏟아부어 강력한 유물인 '용의 영혼(용의 위상)'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전쟁의 기쁨도 잠시, 넬타리온은 이 유물의 힘을 다른 위상 형제들과 네팔렘/인간/엘프 연합군을 향해 거꾸로 휘두르는 충격적인 배신을 저지릅니다. 이 단 한 번의 공격으로 푸른 용군단이 거의 멸족당했고, 말리고스는 광기에 빠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그는 '넬타리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데스윙(Deathwing, 죽음의 날개)'이라 불리게 됩니다.

2단계: 육체의 균열과 아다만티움 장갑 판금
고대 신의 증오와 '용의 영혼'이 가진 너무나도 거대한 마력 때문에, 데스윙의 육체는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배와 등, 가슴 피부가 찢어지고 가슴속에서 용암과 화염이 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스스로의 몸이 붕괴하는 고통 속에서도 데스윙은 굴복하지 않고, 그는 고블린 종족의 제련사들을 시켜 자신의 몸이 찢어져 발화하지 않도록 ‘아다만티움/일레디움 녹인 금속 판금’을 온몸에 박아 넣는 잔혹한 시술을 감행합니다. 쇠사슬과 플레이트로 온몸을 꿰맨 형상은 그의 비틀린 정신과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는 비주얼이었습니다.

3단계: 심원지(Deepholm)에서의 안식과 '대재앙(Cataclysm)'의 번개
다른 위상들에게 쫓겨 상처를 입은 데스윙은 정령계인 '심원지' 깊은 곳에 숨어 수천 년간 몸을 회복하고 고대 신 느조스의 힘을 흡수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대재앙> 확장팩 시절, 더 이상 넬타리온이었던 시절의 인격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파괴의 화신이 되어 정령계를 뚫고 아제로스 지상으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이 여파로 아제로스 대륙 전체의 지형이 바뀐 사건이 바로 '대재앙'입니다.

3. 데스윙의 최종 목적: 구원인가, 완벽한 종말인가?

그렇다면 데스윙이 그토록 바랐던 최종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말씀해 주신 "자신만의 확고한 신념"이라는 포인트에서 관점을 해석해 보면 2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표면적 및 궁극적 목표: '황혼의 시간(Hour of Twilight)'의 완수
데스윙은 완전히 느조스의 충실한 수하이자 아바타로 전락했습니다. 그의 최종 목표는 느조스가 바라는 '황혼의 시간'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황혼의 시간이란 아제로스의 모든 필멸자 생명체와 위상, 심지어 아제로스 행성 자체의 영혼까지 고대 신의 어둠으로 물들여 모든 생명 활동이 정지된 '완벽한 정적과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데스윙의 비틀린 신념적 시선: "고통과 혼란의 완벽한 종식"
데스윙의 시각에서 아제로스는 끊임없이 외계 세력(티탄, 악마, 필멸자들의 전쟁)에 의해 더럽혀지고 고통받는 공간이었습니다.

  • "필멸자들과 다른 위상들은 무능하여 이 우주의 진짜 절망(고대 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 "이 세계를 구원하고 고통을 끝내는 유일한 방법은, 모든 불완전한 생명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고 오직 고대 신의 절대적인 질서(황혼) 아래 묶어두는 것이다."

즉, 데스윙 자신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야말로 아제로스의 사슬을 끊어내고 가혹한 운명에서 세계를 구원하는 '유일한 절대자'라는 지독한 오만과 비틀린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데스윙(넬타리온)의 서사는 단순히 "착했던 놈이 갑자기 나빠졌다"는 뻔한 악당 스토리가 아닙니다.

그는 아제로스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수호하라는 막중한 과업(신념)을 부여받았으나, 바로 그 대지 깊은 곳에서 다가온 고대 신의 속삭임에 정신이 오염되어 자신의 신념을 '파괴'로 오해하게 된 비극의 인물입니다. 온몸이 찢겨 나가는 고통을 금속 판금으로 꿰매어 참아내면서까지 자신이 맞다고 믿는 길(대재앙)을 향해 내달렸던 그의 모습은, 악마이기 이전에 고대 신의 입맛대로 조종당한 '가장 불쌍한 희생양'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광란의 전투 끝에 용의 영혼과 4대 위상, 그리고 아제로스의 영웅들(플레이어)에 의해 혼돈의 폭풍 속에서 분해되어 소멸하면서, 넬타리온은 수만 년 동안 그를 괴롭히던 고대 신의 속삭임과 아다만티움 프레임의 끔찍한 육체적 고통에서 비로소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타락한 파괴자 데스윙. 그는 어쩌면 너무나 무거운 수호자의 책임감과 단단했던 신념이 고대 신의 간교한 꼬임에 빠졌을 때, 얼마나 끔찍한 재앙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워크래프트 역사상 가장 웅장하고도 슬픈 이야기 일 것입니다.